미끄러지는
서진아트스페이스 | 9.25~9.30.2024
개인전
서성이는 물결, 흩어지는 안녕—
글 박소호 (예술공간 의식주)
동경이 차오르는 곳
원시사회에서 문명사회로 이전되면서 인류는 생태계의 꼭짓점을 점유하게 되었고, 다른 종과 생물을 두 발아래에 두게 되었다. 야생과 독립된 울타 리를 만들고 견고한 구조물을 쌓아가면서 우리는 다른 종들의 사라짐을 바라보며 이별을 고하고 있다. 인간이 지구상의 다른 종과 차이를 둘 수 있 었던 이유, 그들 사이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슬픔, 기쁨, 분노, 쾌락으로 구분되는 감정의 면모를 지녔기 때문이다. 서로의 표정을 통해 위기를 감지하고, 행동과 소리를 통해 교류하고 협력할 수 있었다. 뭉칠 수 있게 되었으며, 보다 효율적이고 빠르게 집단이 원하는 유토 피아를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가진 이 감정은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많은 것을 축적했지만,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했다. 셀 수 없을 만큼 잘게 쪼개어진 감정의 단서 중에서 생의 첫 순간 터트리는 눈물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이는 호흡을 가지게 된 첫 순간에 내뱉은 최초의 반응이 자, 가장 첫 번째 발화이다. 고통일 수도, 슬픔일 수도, 분노일 수도 있는 이 한 방울은 유아기와 유년기를 거쳐 청년기를 지나 노인이 될 때까지 스스 로의 얼굴에 다채로운 빛과 그림자를 새긴다. 인간의 초상, 우리의 얼굴은 슬픔으로 대변되는 눈물이 증발되는 시간이 새겨져 있으며, 알 수 없는 내 일에 대한 동경이 차오르는 투명하고 깊은 수조다. 깊은 감정의 수조를 채워가는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원시적 야생과 영원한 작별을 눈앞에 두 고 있다.
시간의 주름, 서성이는 물결
면 위에 선이 쌓이고, 선 위에 면이 쌓인다. 작가 조유진의 화면은 선과 면이 섞여 있으면서 분리된 기묘한 평면이다. 때로는 덩어리가 부유하고 때 로는 가느다란 시간이 유영한다. 풍부한 공간이 드러나 있지만, 이내 납작하고 평탄한 표면의 질감을 인지할 수 있다. 사진 표면에서 느껴지는 가장 얇고 판판한 코팅 면이 연상되기도 한다. 그는 일정한 기간, 설정된 공간을 계획하지 않는다. 파고의 높낮이를 잔잔하게 유지하면서 하루, 이틀, 삼 일, 그리고 여러 날에 걸쳐 바뀌는 환경과 온도를 자연스레 흡수한다. 이 과정은 시간에 따라 유발되는 다양한 사건과 사고, 현장을 기록하는 일기와 같은 맥락을 취한다. 하지만, 작가가 담아내는 이 일기적 화면은 사뭇 다른 면모를 발산한다. 명사처럼 일정한 대상에서 출발하거나, 서사와 이야기 를 담을 수 있는 풍경을 그려내지 않는다. 잃어버린 기억의 집을 찾아가듯이, 어쩌면 저 멀리 사라진 유토피아의 원형을 염원하듯이 부드럽고 온화 한 호흡을 캔버스에 내려 앉힌다. 이 때문인지 푸르게 유영하는 면과 선들은 여러 가지 이미지와 현상을 상상하게 한다. 시원함과 서늘함을 동시에 품고 있는 푸른색, 따듯함과 뜨거움을 함께 공유하는 붉은 색처럼, 조유진의 회화는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 새겨진 수많은 표정의 색과 형태를 허 용한다. 서로 섞일 수 없는 사연, 전혀 교류될 수 없는 희, 노, 애, 락이 교차하는 다의적 공간이다. 이 소박하지만 깊은 수조에는 우리 스스로에게 새 겨진 감정의 그을음, 오랜 시간 지속된 시간의 주름에게 보내는 안부의 인사가 담겨있다.
그의 화면은 푸르고 깊은 물을 담아낼 수 있고 붉고 넓은 빛을 담아낼 수 있는 투명한 수조와 같다. 조유진의 회화와 마주하게 된 처음의 인상에는 얇은 표면을 유영하는 형형색색의 선이 발견되는데, 이들은 아주 정성스럽고 고요한 움직임을 머금고 있다. 일정한 패턴과 구조를 취하지 않는다. 햇빛과 달빛을 동시에 포용한 잔잔한 윤슬처럼, 푸름과 붉음이 서로를 동경하며 만들어낸 노래처럼 화면을 통과하는 손끝의 고요한 동선이 남아있 다. 우리가 잃어버린 노스탤지어, 혹은 지나간 시간에 봉인된 주름을 쓰다듬는 섬세한 손길처럼 느껴진다. 고착된 물감은 물리적으로 멈춰 있고 고 정되어 있지만, 음표가 악보 위를 흘러가는 것처럼, 부드러운 춤사위를 만들어낸다. 그의 작업은 이렇게 시청각적 감각을 자아낸다. 무엇을 재현하 고, 그려 낸다기보다, 우리의 눈을 움직이게 하고 서성이게 한다. 세월의 깊은 물을 담아내고 빛의 가느다란 주름을 투과하게 하는 조유진의 푸른 수 조는 기쁨의 눈물과 슬픔의 웃음이 모이는 중의적 공간이다.
어쩌면, 사라지고 흩어지는 안녕들
우리가 느끼고 체험하는 3차원 공간에서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른다.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사라짐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 는지도 모른다. 어느 곳에 좌표를 두고, 어떤 곳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가 가진 시간의 모양은 매우 다른 양상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시간의 흐 름 속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이 땅에 기거하는 모든 것은 멸망을 향해 발을 내디딘다. 작가 조유진의 회화에서는 이러한 한정된 시공간을 인정하고 순응하는 춤이 새겨져 있다. 각자의 시간, 사라질 내일을 예측할 수 없지만, 곧 만나게 될 내일의 누군가에게 고하는 안녕의 인사가 담겨있다. 새롭 게 마주한 현상을 기대하고, 불현듯 떠오른 기억이 회상되는, 오늘을 중심으로 내일과 어제의 시간이 교차되는 손짓이 스며있다. 조유진의 회화는 스스로 말한다. 헤어짐, 만남, 상실, 사라짐을 내재하고 태어난 우리는 모두 안녕이라는 같은 이름과 인사를 지니고 있다고. 사라짐의 시간 속에서 흩어진 안녕들을 수집하는 공간, 이쪽과 저쪽의 감정, 서로 반대하는 얼굴과 표정이 대면할 수 있는 공간, 작가 조유진의 푸른 회화는 보다 많은 의 미와 어휘들이 쉬이 기댈 수 있는 허용의 화면이다. ‘지우고’, ‘그리기’가 같은 시간 선 안에 유영하면서 동의어가 될 수 있는 곳, 이름과 언어 이전의 시간이 머무는 곳, 익명의 이름들이 머무를 수 있는 다인칭의 땅이다.
미끄러지는
서진아트스페이스 | 9.25~9.30.2024
개인전
서성이는 물결, 흩어지는 안녕—
글 박소호 (예술공간 의식주)
동경이 차오르는 곳
원시사회에서 문명사회로 이전되면서 인류는 생태계의 꼭짓점을 점유하게 되었고, 다른 종과 생물을 두 발아래에 두게 되었다. 야생과 독립된 울타 리를 만들고 견고한 구조물을 쌓아가면서 우리는 다른 종들의 사라짐을 바라보며 이별을 고하고 있다. 인간이 지구상의 다른 종과 차이를 둘 수 있 었던 이유, 그들 사이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슬픔, 기쁨, 분노, 쾌락으로 구분되는 감정의 면모를 지녔기 때문이다. 서로의 표정을 통해 위기를 감지하고, 행동과 소리를 통해 교류하고 협력할 수 있었다. 뭉칠 수 있게 되었으며, 보다 효율적이고 빠르게 집단이 원하는 유토 피아를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가진 이 감정은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많은 것을 축적했지만,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했다. 셀 수 없을 만큼 잘게 쪼개어진 감정의 단서 중에서 생의 첫 순간 터트리는 눈물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이는 호흡을 가지게 된 첫 순간에 내뱉은 최초의 반응이 자, 가장 첫 번째 발화이다. 고통일 수도, 슬픔일 수도, 분노일 수도 있는 이 한 방울은 유아기와 유년기를 거쳐 청년기를 지나 노인이 될 때까지 스스 로의 얼굴에 다채로운 빛과 그림자를 새긴다. 인간의 초상, 우리의 얼굴은 슬픔으로 대변되는 눈물이 증발되는 시간이 새겨져 있으며, 알 수 없는 내 일에 대한 동경이 차오르는 투명하고 깊은 수조다. 깊은 감정의 수조를 채워가는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원시적 야생과 영원한 작별을 눈앞에 두 고 있다.
시간의 주름, 서성이는 물결
면 위에 선이 쌓이고, 선 위에 면이 쌓인다. 작가 조유진의 화면은 선과 면이 섞여 있으면서 분리된 기묘한 평면이다. 때로는 덩어리가 부유하고 때 로는 가느다란 시간이 유영한다. 풍부한 공간이 드러나 있지만, 이내 납작하고 평탄한 표면의 질감을 인지할 수 있다. 사진 표면에서 느껴지는 가장 얇고 판판한 코팅 면이 연상되기도 한다. 그는 일정한 기간, 설정된 공간을 계획하지 않는다. 파고의 높낮이를 잔잔하게 유지하면서 하루, 이틀, 삼 일, 그리고 여러 날에 걸쳐 바뀌는 환경과 온도를 자연스레 흡수한다. 이 과정은 시간에 따라 유발되는 다양한 사건과 사고, 현장을 기록하는 일기와 같은 맥락을 취한다. 하지만, 작가가 담아내는 이 일기적 화면은 사뭇 다른 면모를 발산한다. 명사처럼 일정한 대상에서 출발하거나, 서사와 이야기 를 담을 수 있는 풍경을 그려내지 않는다. 잃어버린 기억의 집을 찾아가듯이, 어쩌면 저 멀리 사라진 유토피아의 원형을 염원하듯이 부드럽고 온화 한 호흡을 캔버스에 내려 앉힌다. 이 때문인지 푸르게 유영하는 면과 선들은 여러 가지 이미지와 현상을 상상하게 한다. 시원함과 서늘함을 동시에 품고 있는 푸른색, 따듯함과 뜨거움을 함께 공유하는 붉은 색처럼, 조유진의 회화는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 새겨진 수많은 표정의 색과 형태를 허 용한다. 서로 섞일 수 없는 사연, 전혀 교류될 수 없는 희, 노, 애, 락이 교차하는 다의적 공간이다. 이 소박하지만 깊은 수조에는 우리 스스로에게 새 겨진 감정의 그을음, 오랜 시간 지속된 시간의 주름에게 보내는 안부의 인사가 담겨있다.
그의 화면은 푸르고 깊은 물을 담아낼 수 있고 붉고 넓은 빛을 담아낼 수 있는 투명한 수조와 같다. 조유진의 회화와 마주하게 된 처음의 인상에는 얇은 표면을 유영하는 형형색색의 선이 발견되는데, 이들은 아주 정성스럽고 고요한 움직임을 머금고 있다. 일정한 패턴과 구조를 취하지 않는다. 햇빛과 달빛을 동시에 포용한 잔잔한 윤슬처럼, 푸름과 붉음이 서로를 동경하며 만들어낸 노래처럼 화면을 통과하는 손끝의 고요한 동선이 남아있 다. 우리가 잃어버린 노스탤지어, 혹은 지나간 시간에 봉인된 주름을 쓰다듬는 섬세한 손길처럼 느껴진다. 고착된 물감은 물리적으로 멈춰 있고 고 정되어 있지만, 음표가 악보 위를 흘러가는 것처럼, 부드러운 춤사위를 만들어낸다. 그의 작업은 이렇게 시청각적 감각을 자아낸다. 무엇을 재현하 고, 그려 낸다기보다, 우리의 눈을 움직이게 하고 서성이게 한다. 세월의 깊은 물을 담아내고 빛의 가느다란 주름을 투과하게 하는 조유진의 푸른 수 조는 기쁨의 눈물과 슬픔의 웃음이 모이는 중의적 공간이다.
어쩌면, 사라지고 흩어지는 안녕들
우리가 느끼고 체험하는 3차원 공간에서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른다.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사라짐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 는지도 모른다. 어느 곳에 좌표를 두고, 어떤 곳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가 가진 시간의 모양은 매우 다른 양상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시간의 흐 름 속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이 땅에 기거하는 모든 것은 멸망을 향해 발을 내디딘다. 작가 조유진의 회화에서는 이러한 한정된 시공간을 인정하고 순응하는 춤이 새겨져 있다. 각자의 시간, 사라질 내일을 예측할 수 없지만, 곧 만나게 될 내일의 누군가에게 고하는 안녕의 인사가 담겨있다. 새롭 게 마주한 현상을 기대하고, 불현듯 떠오른 기억이 회상되는, 오늘을 중심으로 내일과 어제의 시간이 교차되는 손짓이 스며있다. 조유진의 회화는 스스로 말한다. 헤어짐, 만남, 상실, 사라짐을 내재하고 태어난 우리는 모두 안녕이라는 같은 이름과 인사를 지니고 있다고. 사라짐의 시간 속에서 흩어진 안녕들을 수집하는 공간, 이쪽과 저쪽의 감정, 서로 반대하는 얼굴과 표정이 대면할 수 있는 공간, 작가 조유진의 푸른 회화는 보다 많은 의 미와 어휘들이 쉬이 기댈 수 있는 허용의 화면이다. ‘지우고’, ‘그리기’가 같은 시간 선 안에 유영하면서 동의어가 될 수 있는 곳, 이름과 언어 이전의 시간이 머무는 곳, 익명의 이름들이 머무를 수 있는 다인칭의 땅이다.